[기고] 동지들! 혁명당 강령수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天安門


소책자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에 대한 약평
- 사노위 전북지역위 사무국장 백종성


1. 소책자 개괄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라는 사노위의 소책자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소책자는,

첫 번째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왜 극복이 불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현재의 공황은 단순한 순환적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뿌리깊은 구조적 위기이다.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며, 이 막다른 길에 도달한 자본주의가 노동자 민중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는 저항 역시 유럽과 중동에서 전세계로 번지고 있으며,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사회주의가 어떤 사회인가를 논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의 사적소유를 끝장내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생산을 통제하는 사회, 성별의 차이와 성적지향의 차이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 제국주의의 지배와 폭력을 종식시키는 사회, 자본가 국가기구를 파괴하고노동자계급의 권력기구를 세워가는 사회이다.

세 번째로 이런 사회주의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종식시키는 운동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그 자체로 인해 필연적이고, 부르주아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인간본성의 이기성'이야말로 계급사회가 낳은 이데올로기이다. 소련을 비롯한 소위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국제혁명의 패배와일국사회주의론의 득세, 그에 따른 폭력적 생산력발전정책, 그리고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형해화가 낳은 당관료들의 지배계급화에 기인한다(또한 사노위 내부의 소련사회 평가에 대한 이견을 소개한다). 사회주의는 비현실적이고 사민주의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사민주의는 20여년간 지속된 자본주의의 장기호황이라는 일시적인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곧 호황은커녕 공황이 전세계를 덮치고 있는 현 시기에 사민주의의 전망은 기만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주의야 말로 사민주의보다 훨씬 현실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네 번째로 소책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의 시급한 필요를 주장하며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운동이 노동자정치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민주대연합과 진보대통합은 왜 기만적인가를 논한다. 또한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 운동의 위기에 대한 대안은 이미 그 실패가 드러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 운동이 아닌 대안적 지도력이어야 하며, 그 대안이 바로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임을 주장한다.

다섯 번째로 소책자는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의 노선을 소개한다. 사회주의 노동자정당은 응당 노동계급의 정당, 의회주의와 수권주의를 거부하는 혁명정당이다. 역사에서 노동자 계급은 스스로의 권력기관들을 창출해갔다. 1871년의 프랑스 파리코뮨, 1917년의 러시아 소비에트, 1936년 스페인 노동자민병대, 1968년 프랑스 파업위원회, 1972년 칠레의 코르돈등이 그 예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권력기관이며, 이들은 의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민주적이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은 여성, 생태, 소수자문제를 계급의 문제속에 포괄하며,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견지한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당원은 이름만 올려놓은 페이퍼 당원이 아닌,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실천적 주체여야 함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소책자는 사노위가 이땅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점하는 위치를 논한다. 사노위의 결성은 그 동안 노동조합이나 각급 현장조직 뒤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활동했던, 즉 사회주의 강령에 입각한 정치활동에 불철저했던 이 땅 사회주의자들 스스로의 각성과 반성에 기초하며, 이제 우리는 당을 건설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나서야 함을 주장한다.


2. 이행강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 그리고 계급동맹전략의 잔재

소책자는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회주의의 원칙을 쉽게 잘 풀어쓰고 있다. 08년 이후의 세계공황으로 드러난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코 평화적으로 지양될 수 없으며 국제적으로 촉발된 계급투쟁이 증명하듯 저항주체들이 형성되고 있음에서 당건설의 가능성과 필요를 주장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지향과 운영원리 및 역사적으로 드러난 노동자권력의 양태와 본질 역시 잘 짚어내고 있다.

일부 동지들의 비판, 즉 ‘미래소득’이라는 단어가 사회당류의 ‘기본소득제’로 연결되는 함의를 지닌다는 비판은 사실과 다르다. 소책자가 이미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논하고 있다는 점, 명백한 의회주의 반대와 자본가 국가기구 파괴및 노동자 자체권력기구 형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득이라는 단어로 기본소득제를 유추하는 것은 과도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부채로 연명하고 있는 공황기 자본주의가 지금당장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부채를 통한 연명 자체가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산소호흡기를 착용시킨 것에 불과함을, 즉 부채를 통한 연명 그 자체를 위해 또 다시 무시무시한 수탈과 착취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미 그것은 현재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즉 대중적 수탈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소책자를 두고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우리에게 비판의 자유는 있을지언정, 잘못된 사실에 근거해 잘못된 비판을 할 자유는, 없다. 우리에게 '오보'의 자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책자에 문제는 명백히 존재한다. ‘이행강령적 관점의 부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미적시’가 그것이다. 먼저, 2장에 서술된 사회주의 상은 참으로 평온하다. 물론 사회주의가 수립되었을 때 좋은 점은 무수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서술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교육과 학습의 자리에서 자본가가 없을 때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정작 그 다음이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가 되면 이러저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에 비춰보면 우리 힘이 너무 적지 않나요?”맞다. 우리의 힘은 너무 적다. 우리 스스로 잘 알고있듯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야만적 권력에 비해 우리의 역량은 명백히 한정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그런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을 계급대중에게 주는 것이 선동의 핵심이다. 단순히 '사회주의가 되면 이렇게 좋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나열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현재의 투쟁과 미래의 상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선취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미래로 이어지는 사슬의 고리를 움켜쥘방법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 혁명정치의 핵심이다. 단순히 사회주의가 '미래의 상태가 아닌 현실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행강령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전북 버스파업의 예를 들어보자. 체불임금 문제로 투쟁을 시작한 그 동지들은 이미 파업투쟁을 통해 자본가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어떻게? 파업투쟁 자체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버스소유권/면허권 몰수를 통한 완전공영제 쟁취’라는 전망을 통해! 다음을 보자.

완전공영제의 첫 번째 단계로, 우리는 버스자본가의 버스 소유권과 면허권을 무상으로 환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버스파업으로 시청, 도청, 노동부를 비롯한 국가기관과 자본가들의 노골적 유착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직접적 서비스 생산자인 버스노동자, 이용자인 시민이 운영을 주도해야 한다.

백해무익함이 증명된 버스자본가들 대신 대중교통 서비스 생산자인 노동자, 서비스 소비자인 시민이 함께 ‘대중교통관리위원회’를 구성하자. 이를 통해 버스운영을 통제하고, 인간적인 노동에 기반한 교통체제를 운영하자. 운영 및 통제의 권한을 생산자인 노동자와 소비자인 시민에게 이양하고, ‘대중교통의 사회화’에 대한 요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사노위 8호, 이삼형, <대중교통의 사회화를 위한 버스 완전공영제를 즉각 실현하자!>]


버스동지들은 단순한 국유화를 넘어, 이미 노동자 통제까지 공감하고 있다. 그 동지들은 당면요구인 ‘민주노조 사수’와 '노동자 통제'의 연관고리를 본능적으로 알고있다. 이미 자본가들과 한통속임이 명백히 드러난 국가로부터 완전공영제의 노동자성, 자주성,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노조 없이는 죽었다 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것이다. 사노위 전북지역위원회가 진행한 다음 인터뷰를 보자.


이: 완전공영제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국가로 소유권만 이전하는 경우, 말하자면 국가가 지명한 법정관리인이 관리를 하는건데, 착취구조는 존속한다. 완전공영제를 하되, 경영은 노동자, 시민이 해야하지 않겠는가.
남 : 노동자와 시민이 꼭 참여해야한다. 전북고속에는 버스에 대한 주주들도 있는데, 한군데만 고치면 되는 걸 통째로 갈아끼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경우도 봤다. 또 부속품 가게에서 로비를 하더라. 그러다보니 허위지출이 많다. 운영을 노동조합이 관리하고, 시민은 총지출입을 관리해서, 제대로 관리했으면 좋겠다.
[3월 11일 사노위 전북지역위원회 신문, 남상훈 전북고속 비대위원장 인터뷰 <솔직히 동지들이 같이 파업을 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에서]


화물연대 동지들은 어떤가? 08년 파업에서 그 동지들은 ‘정유소 국유화’를 주장했고, 이것은 기름값 폭등의 형태로 드러난 공황의 전개 속에서 그 동지들의 파업이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한 이유가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아무리 요구수준이라고 해도, 그것은 매우 소중한 이행강령적 요구이고, 투쟁이다.

우리는 모든 투쟁에서 권력을 지향한다. 우리는 모든 투쟁을 노동자권력의 쟁취와 연결시킨다. 레닌이 말했듯 파업은 혁명이라는 괴물을 배태하고 있으며, 우리는 파업이 배태하고 있는 괴물을 혁명으로, 노동자권력의 쟁취로 이끌고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권 투쟁이니까 여기까지”, “이것은 그 자체로 정치투쟁이니까 저 멀리까지”, 이런 것이야말로 비강령적 태도다. 강령은 권력쟁취의 문제이고, 권력쟁취의 문제는 곧 노동계급의 권력의지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정확히 바로 이것이 이행강령이 원하는 것이다. 공황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노동자권력이라는 연꽃을 피우는 일은 이행강령 없이는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다. 이미 권력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는 노동자투쟁을 실제의 권력으로 인도해야 한다. 당이라는 조직적 도구는 강령에 기반해 정치활동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강령은 반드시 이행적 관점을 내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계급 스스로 수행하게 될 그 수많은 변화는 현실투쟁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채 정치권력의 접수 이후에야 가능할 먼 미래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사활적 투쟁과 권력의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못하는 강령은 포켓용 당원수첩의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이 현재 제출된 3인안이 우리의 강령이 될 수 없는 핵심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그토록 처절했던 09년 쌍용차투쟁 시기, 현대차 그리고 기아차의 투사들은 실제로 라인을 잡을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했다. 그 동지들은 ‘쌍용차 동지들이 깨져나가는데 금속노조가 안한다고 이렇게 보고만 있는 나는 과연 활동가인가?’라는 고민 속에 수도 없이 번뇌했다. 그 수많은 동지들에게 실제로 라인을 잡자고 책임있게 선동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면, 즉 "관료들이 파업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파산기업 국유화와 노동자통제의 전망 속에 생산을 멈추자"고 선동할 수 있는 준비된 세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승리했을 것이다. 이것이 공상적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승리할 생각이, 혁명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이행적 관점의 부재가 사회주의를 그토록 평온하게만 묘사한,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야만적 폭력과의 극명한 대비만을 묘사한, 그를 통해 결과적으로 국가의 압도적 폭력과 우리의 실력의 차이만을 부각시키게 된 이유라고 본다.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 러시아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 칠레의 코르돈은 노동자권력의 기구였다. 이것을 서술한 것은 소책자의 과학성을 담보한다. 그러나 반쪽만 담보한다. 노동자조직의 형태와그 조직을 관통하는 정치적 요구는 한 몸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권력기구들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산업의 통제, 생산의 노동자 통제가 그 핵심이었다. 이 노동자통제의 요구를 일상에서 전면화시키지 못하는한, 생산의 노동자통제를 위한 권력기관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날 리는 만무하며,천우신조로 그것이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 권력기관을 유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의 요체다.

두 번째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적시문제다. 소책자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적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소책자가 공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수행한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곧 전태일 열사의 ‘모범업체’ 구상이 가지는 한계와 같다. 즉 마음씨 좋은 독지가가 나타나 8시간 일하고, 8시간 교육하고, 8시간 휴식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구상은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노동자가 해방된 사회가 자본주의 안의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즉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파괴하지 않고, 노동자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오웬과 프루동과 생시몽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소책자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적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이 곧 공상적 사회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책자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와 노동자 권력기관의 건설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할 핵심적 문제는, 강령에 어떤 노선을 적시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는 곧 그에 대한 동의여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노위의 한 동지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강령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무장봉기를 적시하면 프롤테타리아 독재와 무장봉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노위에 못 들어오지 않나요?” 그런 사람들이들어오면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은 이미 파산한 의회주의 유로코뮤니즘 정당이 된다.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무장봉기의 문제는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다. 인류의 한줌에 불과한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재, 즉 권력을 다투는 무자비한 투쟁을 통해서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백배 천배 뛰어난, 아니 질적으로 다른 노동자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 혁명사상의 요체다.

그렇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강령에서 사수하려는 투쟁은 역사적으로 주요한 계급투쟁이었다.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종식을 선언한 스탈린주의자들에 발맞추어 당 강령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삭제를 추진한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우리가 개량적이라고 비판하는 발리바르조차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수하기 위해 싸웠다. 그때의 팜플렛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하여(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저작이다. 2년전 LCR(혁명적공산주의동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령에서 삭제하고 NPA(반자본주의신당)이 되었다. 다음의 인터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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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R에서 NPA로 재창당되면서 당명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삭제되었다.

= LCR의 모든 당원이 혁명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LCR 안에서도 다수의 당원들은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소수 그룹의 반혁명파도 있다. 그래도 모두들 어쨌든 LCR 당원이었고 지금은 모두들 NPA 당원이다.
[2008년 11월 26일 레디앙, 평당원 아가트, LCR과 NPA를 말하다. 2008년 11월 18일 파리3대학에서, 박지연 파리 통신원]


그들은 이미 노동계급의 이해를 민중의 이해와 섞기 시작했고, 이제 민중의 이해를 대중의 이해와 섞기 시작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삭제하는 것의 귀결은, 브장스노라는 ‘스타’에 의존한 합법 의회주의 전략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어떤 기대도 가지지 않는다. 한국 정치지형으로 치면, 이들의 대응물은 진보신당 정도가 될 것이다.

세 번째가 소책자에는 계급동맹 전략의 잔재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50페이지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계급동맹 전략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노동자 계급정당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만을 위해 싸우지 않으며,①자본주의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민중의 이해를 위해 싸운다. 동시에 노동자 계급이 전체 민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안고 싸울 수 있는 계급적 감수성과 헤게모니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한다. ②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전체 민중의 전위에 서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투쟁의 주체로 서나가도록 활동하는 당이다.”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 50페이지]


①에 대한 서술에서 ②는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예를들면, ①은 노동자계급과 도시빈민/영세상공인이 단결해야 한다는 말이고, ②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단결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가? 뉴타운 정책에 반대해 노동자와 민중이 연대하여 싸우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 도모된다는 것인가? 단호히 말하겠다. 노동자 계급정당은 모든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정당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지지하는 민중만을 대변한다.소책자가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정당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만을 위해 싸우지 않으며”라는 문장은 암묵적으로, 아니 명시적으로 계급동맹 전략을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모든 민중’의 이해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사실상 쁘띠부르주아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3인안의 동지들이 그람시를 굉장이 우경적으로 해석한다고 본다. 헤게모니 전략은 인민전선전략, 즉 계급동맹전략과 어떤 관계도 없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주아의 요구를 받아안는 것도 아니고, 양자의 요구를 섞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주도(이니셔티브)하에 그들을 지도한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그람시에게 가장 중요한 ‘진지’는 공장평의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3인안을 주장하는 동지들은 다수자혁명을 계급간 동맹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이 동지들은 뒷문으로 인민전선전략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썼던 다수자 혁명의 의미는 3인안을 주장하는 동지들이 이해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맑스는 노동계급을 ‘인류의 절대다수’라고 썼다. 쁘띠부르주아가 분해되어 노동계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썼다. 또한 맑스는 공산당은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지지한다’고 썼다. 나는 단순히 “맑스가 그렇게 썼으니 맞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의 정신과 노선에 대한 문제다. 다시 말하겠다.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옹호한다. 이것은 노동자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건설할 당은 '사회주의민중정당'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이해는 때로는 쁘띠부르주아의 요구와 충돌하며, 그때 우리는 단호히 노동계급의 요구를 지지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다수자 혁명전략의 포기할 수 없는 핵심이다.


3. 혁명당은 혁명이전에 이미 건설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의 모순은 대중의 피부에 와닿는 정도가 아니라 DNA에 각인될 정도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투쟁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체제를 뒤집어 엎는 대신에 체제의 좁은문을 뚫고 들어가려 발버둥을 치는가?

소위 ‘민주정부’ 10년 간, 우리는 고립된 채 전망없이 싸워왔다. 패배를 거듭하며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는 그 야성을 상실했고, 사회주의자들은 행동강령의 부재 속에서 그저 ‘구조조정 분쇄’라는 구호로 대중운동을 추수했다. 전투파, 혹은 현장파의 결집체였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전투적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채 파산했으며 전노투 역시 좌파결집 이상의 시도가 되지 못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적 전망의 부재속에 개량주의자-의회주의자들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이라는 그들 고유의 프로그램을 진전시켰고, 이것은 어느새 조직 노동운동의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양 굳어졌다. 대중투쟁이 후퇴하면 후퇴할수록 개량주의자들의 퇴행적 전망은 기승을 부렸고, 전투적 현장파는 설 자리를 잃어갔다. 조직노동운동과 임단투는 이음동의어가 되었으며, 노동자정치는 표 찍어주고 세액공제 후원금 내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전망없이 후퇴해온 10년을 거쳐 우리가 맞이하게 된 것은 850만 비정규직, 실질실업률 30%라는 끔찍한 현실이다.

쌍용차에서 드러났듯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의 생존조차 이미 고려대상이 아니다. 싸우기 위해 만들었다는 산별노조는 연대파업은커녕 기세있는 가두투쟁조차 하지 못했다. 문제는 전망이다. 싸울 수 있다는 전망,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전망, 계급투쟁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전망! 당건설의 전망!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너무나도 늦게 제기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강령이라는 방향타가 필요하며, 그 강령을 실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이라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현 시기 모든 계급투쟁의 성과는 당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수렴되어야 하며, 더 이상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구체적 전망을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라는 추상적인 말로 에둘러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가 또 다시 써클로 추락한다면공황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노동계급을 집어삼킬 것임을!

지금도 튀지니, 이집트, 리비아, 예멘에서 무수한 노동계급이 피를 뿌리고 있다. 중동과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바로 이 땅에서 계급투쟁이 다시 발발하고 있다. 1871년 파리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프로이센이 진압했듯, 바레인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봉기를 사우디 자본가계급이 진압하는 자본가들의 국제주의가 펼쳐지고 있다. 남한 자본가들은 대법원 판결조차 지키지 않은 채 자신의 초과착취체제를 사활적으로 지키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령에 적시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25일간 신나게 두들겨 맞은 현대차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자위적 무장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혁명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동지들! 지금도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헌납하고 있다. 우리가 이 국면을 놓치면 우리는 당건설의 'ㄷ'자를 다시 꺼내기 위해 몇 년, 몇 십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흰머리의 전공투 출신 일본 활동가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국가에서 거세당한 채 해마다 메이데이가 돌아오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가서 '국제연대'의 초라한 깃발을 흔들어야 하는 미래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처럼 혁명이 도래해서야 부랴부랴 혁명당을 만든 죄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혁명당은 혁명이전에 이미 건설되어 있어야 한다.모든 주객관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혁명은 폭풍처럼 올 것이라고, 그러니 당건설로 나아가라고, 결코 다시는 써클로 추락해서는 안된다고! 동지들, 단호히 나아가자!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칙을 움켜쥔 노동자혁명정당을 반드시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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